기사 메일전송
“자세히 살펴보면 ‘인생의 기회’가 보일 겁니다”
  • 정태기
  • 등록 2023-09-12 03:30:46

기사수정
  • 정승달 광주터미널(주). 지제이산업(주) 회장 인터뷰


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찾아내 사업을 일궈내는 이들이 있다.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‘장사꾼’을 넘어선 ‘사업가’들이다. 2009년에 문을 연 경기 광주시 시외버스터미널은 ‘보이지 않는 가치’를 발굴한 좋은 사례다. 단순히 여객 운송만을 위한 터미널을 넘어 공간에 가치를 부여하는 콘셉트를 적용해 광주시의 랜드마크가 됐다. 터미널 내부는 문화, 쇼핑, 여행을 한 곳에서 누릴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.

이 같은 혁신적인 발상을 한 ‘사업가’를 만났다. 정승달 광주터미널㈜ 대표다. 정승달 대표는 터미널 자체의 사업성보다 장소와 공간의 가치를 읽어냈다.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인 송강 정철의 직계손인 정승달 대표는 사업을 하면서도 대학원까지 진학하며 학업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. 그의 사업가적 면모는 이 같은 지성을 바탕으로 한 분석에서 나온다. 정승달 대표로부터 그의 삶과 사업가로서의 지혜를 들었다.


- 처음부터 사업을 일으키려 생각을 하셨던 건가요.

“처음부터 사업을 했던 건 아니었고, 월급쟁이였어요.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를 다녀온 후로 고향에 내려와서 지역 농협을 다녔죠.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. ‘내가 이렇게 살려고 했던 게 아닌데’ 싶었던 거죠. 애들도 커가고 하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그만뒀어요. 내 DNA가 가만히 있는 성향이 아니었나 봐요. 이렇게 있어봐야 비전이 없다고 생각했어요. 월급쟁이 생활 계속 해봐야 정년 되면 퇴직해서 사는 게 정해져 있잖아요.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거죠. 미국도 오가고 하면서 사업을 하려 했죠.”


광주터미널 신청사 전경


- 터미널 운수 사업에는 어떻게 처음 관심을 가지셨나요.

“미국을 다녀오고 사업체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, 그 회사에서 개발사업을 했어요. 그걸 보니까 꽤 괜찮아 보이더라고요. 그걸 도우려고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는데, 처음에는 안양 터미널을 하려고 했어요. 지금 안양 평촌에 큰 터미널이 있잖아요. 그걸 결국엔 못 하긴 했는데… 그게 안타깝더라고요. 그래도 그때 공공시설에 대해 많이 공부를 하게 됐죠. 그 후에 경기 광주시가 개발되면서 시에서 터미널이 필요했어요. 제가 있던 회사에서 하려고 했는데 다 준비된 상태에서 우여곡절 끝에 결국 못 하게 됐었죠. 토지 분양 받아서 중도금까지 내고 했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못 하게 되면서 재판까지 갔어요. 결국 손해배상으로 다 받아내기는 했지만 회사는 문을 닫았습니다. 그렇게 되면서 저도 나왔죠. 하지만 터미널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고, 그게 바탕이 됐어요.”


- 쉬운 과정이 아니었군요. 터미널이 그때만 해도 좋은 사업 아이템이었을 텐데요.

“괜찮은 업종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자세히 보면 시장성은 떨어졌어요. 마이카 시대가 된 후로는 자차가 많았으니까요. 아무래도 사양산업이었습니다. 그런데 이 사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공시설이란 말이에요. 시민들을 위한 사업이 될 수 있었어요. 생각해 보니 보람된 일이더라고요. 이게 시민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선 뒤로는 자세히 연구를 해봤죠. 길게 보면 나에게 좋은 사업이기도 하면서 시민들에게도 좋은 ‘윈-윈’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.”


- 사업성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는 말씀이군요.

“사업 분석으로만 접근하니까 전혀 사업성이 없었어요. 일단 경기 광주는 수도권하고 가까워서 터미널이 큰 필요가 없었어요. 터미널 자체만 가지고는 사업성이 나오질 않더라고요. 광주는 인구가 분산되어 있어요. 동서울 터미널로 바로 갈 수도 있고, 곤지암 쪽에 있는 사람들은 이천으로 가버려요. 또 분당에 가까우면 성남으로 가죠. 전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요. 터미널을 운수사업만으로 보고 사업을 시작하면 그건 바보짓이에요.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 안 했던 겁니다. 하지만 도시라면 갖춰야 할 여러 시설 중 하나가 터미널 아닙니까? 그 필요성에 의해서 터미널을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던 것이지 사업성으로 보면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.”


-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 광주에 터미널을 마련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.

“사업성이 없으니까 누구도 손을 안 대고 있었던 땅인데, 나는 ‘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들어보자’는 생각을 했어요. 도시계획에 터미널은 지정이 되어 있으니까. 장소만큼은 좋다고 봤죠. 장소에 욕심이 났던 겁니다. 이 좋은 장소에 터미널만 바라보고 있을 게 아니라 이걸 살려볼 계획을 한번 세워보자 생각했어요. 혁신적으로 콘셉트를 잡아서 공간을 만들었고, 그게 이렇게 발전이 된 겁니다.”


- 터미널을 넘어 공간 비즈니스로 확장을 하신 건데, 사업가로서의 혜안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. 사업가로서 성공한 비결을 후배들에게 조언해 주신다면.

“우선은 자기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. 뭔가를 보면 그냥 넘기지 않고 세심하게 관찰을 해서 분석하고 판단하려는 시도를 계속 해야 해요. 사람이 평생에 세 번은 성공할 기회를 하늘이 내려준다고 하잖아요. 그런데 그 세 번의 기회를 못 잡고 넘어가는 사람도 있고, 세 번 중에 잡는 사람도 있거든요. 그 기회를 잡으려면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야 해요. 거짓 없이 노력하고 있으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. 사업가로서 그 노력이란 전체를 보고 조율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. 사업을 하는 사람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아요. 한 악기만 잘한다고 해서 좋은 음악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. 여러 악기를 종합적으로 보는 사람이 지휘자거든요. 사업가는 그렇게 하나씩 유심히 보고 잘 다뤄서 종합해 이끌어 나가야 하는 사람이죠. 그런 마음으로 접근해야 회사가 설립되고, 화합해서 운영될 수 있습니다.”


- 연일 정씨 가문의 종친이십니다. 가문에 대한 자부심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.

“대표적으로 고려말 충신인 포은 정몽주와 가사문학의 대가인 정철이 저희 연일 정씨이시죠. 저는 연일 정씨 문천공파인데, 정철 선생께서 영의정을 할 때 하사받은 호가 문천공이에요. 그 직계손입니다. 조선의 대표적인 문인의 가문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, 아이들에게도 공부를 중시하고 장려합니다. 저도 대학을 다니다가 중간에 군대를 갔는데,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 농사 지어서 학교에 보내는 게 드문 일이었거든요. 저는 군대를 가면서 학교를 끝까지 못 다녔지만 그 서운함이 계속 남아 있었어요. 그래서 결국 연세대에서 졸업해서 석사 학위도 받고 했죠. 나이를 먹고 나서 7년을 공부했습니다.”


- 기업을 이끌면서 직원들에게는 어떤 점을 강조하시나요.

“저는 우리 직원들에게 ‘정년퇴직은 없다’는 얘기를 해요. 능력 있을 때까지 있되, 열심히 하자. 회사가 발전해야 다 같이 발전하는 것 아니겠어요. 회사가 존재하지 않으면 직원들도 회사에 있을 수가 없죠. 물론 다른 좋은 직장도 많이 있겠지만 마음을 모아서 오랫동안 같이 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해요. 그래서 직원들에게도 그런 마음으로 근무를 해주길 바란다는 얘기를 종종 합니다. 그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.”


정태기 기자 jtk3355@naver.com

0
  • 목록 바로가기
  • 인쇄


최신뉴스더보기
재택치료 중 우리 아이 아프면? 상담·…
서울 안심소득
모바일 버전 바로가기